2012년 4월 30일 월요일

크리스탈러의 중심지이론

<공간이론의 사상가들>에 실린 글과 동일..




크리스탈러의 중심지이론

- 임석회, 감정평가연구원 책임연구원-


수 많은 공간이론 가운데 아마도 크리스탈러의 중심지이론만큼 유명한 이론은 없을 것이다. 공간이나 지역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크리스탈러란 이름을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크리스탈러의 전생애에 걸친 연구가 중심지이론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거의 모든 연구가 이와 관련된다. 그의 이론은 심지어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만큼 새삼 여기서 다시 소개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 들면서도 공간조직에 관한 연구에서 중심지이론이 차지하는 비중을 본다면, 생애와 함께 그의 이론을 다시 한 번 살피는 것도 전혀 의미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크리스탈러의 생애와 학문적 배경


발터 크리스탈러(1893-1969)중심지이론의 창시자 발터 크리스탈러(Walter Christaller)는 1893년 2월 21일 독일 남부의 흑림지대 베르네크(Berneck)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헬렌(Helene)은 다름슈타트의 중산층 출신으로 성공한 소설가였으며, 그의 부계는 대대로 성직자 집안으로 아버지 역시 목사였다. 지리학과의 인연에 대해 아주 어렸을 때 지도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고 크리스탈러는 회상한다. ‘나는 어떻게 중심지이론을 발견하였는가’라는 자신의 학문을 회고하는 글에서도 초년에 다닌 다름슈타트의 학교에서 훌륭한 지리선생님을 만났으며, 지리에 흥미를 가졌다고 했다. 특히 지도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남달랐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부상을 당해서 병원에 있을 때조차 친구에게 지도를 보내달라고 해서 그것을 보는 것을 낙으로 삼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대학공부를 지리학과에서 한 것은 아니다. 1913년 대학에 입학한 그는 하이델베르크와 뮌헨에서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였다. 그가 다시 지리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29년, 36세의 늦은 나이에 에어랑엔(Erlangen) 대학에 들어가 본격적인 학문 수업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부터 1929년까지는 어떤 면에서 크리스탈러에게 중요한 인생의 실험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한 그는 여러 차례 부상을 당한 끝에 전쟁에 참여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쟁에 환멸을 느끼게 되어 전장에서 돌아왔다. 그의 내면에 사회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잠시 나치 당원이 되기도 하였지만 사회주의 사상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는 단 한 학기만 대학에 있었을 뿐 광부 혹은 건설노동자, 회사원 등으로 일했으며, 신문에 글을 쓰기도 했다.

크리스탈러가 이런 생활들을 끝내고 1929년 30대 중반을 넘은 나이에 왜 학문을 다시 시작하려 했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1928년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되었고, 1921년에 결혼한 부인과도 이혼하였다. 1929년 에어랑엔대학 대학원과정에 입학한 그는 1930년 석사학위를 받고, 1932년 그를 유명하게 만든 박사학위논문, 「남북 독일의 중심지 : 도시기능과 관련된 취락의 분포와 발달에 관한 경제지리학적 연구」로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크리스탈러가 처음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지리학이 아닌 경제학의 한 주제로 생각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리학자 그라드만(R. Gradmann)의 지도를 받게 된 것은 경제학자들로부터 그의 연구가 이렇다 할 반응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크리스탈러의 부탁을 받은 그라드만은 크리스탈러의 연구가 갖는 가치를 인정하여 자신의 관심영역이나 연구방법론이 크리스탈러와는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탈러의 박사학위 지도교수가 되었다. 크리스탈러의 중심지이론에 관한 박사학위논문이 철저하게 연역적 방법으로 공간조직을 설명해 나간다면, 그라드만은 경관학파의 한 사람으로 귀납적 연구방법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 크리스탈러는 에어랑엔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프라이부르크대학으로 옮겨 1937년 교수자격취득논문, 「독일 농촌취락과 지방정부조직과의 관계」를 완성하였다. 이 논문에서 크리스탈러는 그의 기존 연구방법론을 수정하여 귀납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같은 해 독일의 한 유명한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지만 박사학위논문에 비하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크리스탈러는 교수자격취득 후 1938년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강사를 하면서 2년간 지방정부연구소를 세우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40년 이후 연구관련업무를 맡지 못하였으며, 독일의 어떤 대학으로부터도 초빙을 받지 못하였다. 그가 대학교수가 되는 데 실패한 것은 첫째, 연구영역이 당시 독일의 대학에서 지리학과 교수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좁았고, 둘째, 교수자격을 취득하였을 때는 이미 45세로 나이가 너무 많았으며 셋째,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1930년대 초 그는 실제로 추적받고 있음을 염려하여 몇 달 동안 프랑스로 도망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탈러는 1940년 이후에 나치당에 가입하여 그들을 위해 봉사하였다. 중심지이론을 실제로 적용하여 보고자 하는 욕심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40∼1945년 사이 그는 주로 베를린에 머물면서 나치가 점령지에 수행한 취락정비계획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1941년 발표한 논문 「공간이론과 공간질서」와 「동부지방의 중심지와 문화 및 시장영역」에 잘 나타난다.

이와 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탈러의 중심지이론은 독일 지리학계에서 여전히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독일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점차 크리스탈러 중심지이론의 가치가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먼저 디킨슨(R. Dickinson)과 해리스(C. Harris) 등이 간략히 언급한 다음, 1941년 울만(E. Ullman)이 미국 사회학잡지에 기고한 논문에서 크리스탈러의 중심지이론을 소개하였으며, 1945년에는 스웨덴에서 칸트(E. Kant)가 중심지이론을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크리스탈러의 중심지이론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으며, 1966년에는 바스킨(Baskin)에 의해 영어로, 1969년에는 일본어로, 1980년에는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다.

이와 같이 중심지이론이 각광을 받아 감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탈러 개인적으로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으며, 수입도 불규칙하였다. 더욱이 그는 공산당에 가입했는데, 1951∼1952년에는 동독의 지령을 받는 전독일 농림노동자 서클에 간여한 일 때문에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어 수년간 재판을 받기도 했다. 결국 무혐의 판결을 받기는 하였으나 나중에도 미국 방문이 허락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그의 중심지이론은 독일의 지리학계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독일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게까지 되었다. 그리고 1964년에는 미국지리학회로부터, 1968년에는 영국왕립지리학회로부터 상과 메달을 수상하고 스웨덴 룬드(Lund) 대학과 독일 루르(Ruhr)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와 같이 뒤늦게나마 그의 중심지이론이 본국에서 인정도 받고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지만, 그는 곧 1969년 암으로 사망하였다.
크리스탈러의 중심지이론

크리스탈러가 서거한 지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가 중심지이론을 창안하였기 때문이다. 크리스탈러 이후 많은 사람들이 중심지이론을 발전시켜 왔지만 크리스탈러의 기본사고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크리스탈러 중심지이론에서의 중심지는 주변지역에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넓은 의미에서 도시와 동의어이다. 그가 박사학위논문에서 설정한 문제의 틀은 도시의 규모와 수, 분포에 대한 일반적 설명과 그것들간에 어떤 법칙이 내재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것에 대해 연역적으로 먼저 “도시의 규모와 분포를 결정하는 법칙의 존재가 가능한가” 라는 질문부터 시작해 취락지리학에도 법칙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이끌어낸다. 도시의 기원과 성장, 쇠퇴는 주민이 그 도시에서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얻을 수 있는지의 여부와, 도시가 그것을 공급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른다. 즉 경제적 현상이 도시의 존재에 있어서 결정적이기 때문에 취락지리학은 경제지리학의 한 부분이며, 경제현상에 어떤 법칙이 있듯이 취락지리학에도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법칙이 도시의 규모와 수, 분포를 결정하는 데도 기본적으로 작동한다는 논리이다. 즉, 경제생활을 지배하는 근본법칙, 도시와 주민 간의 관계에서 재화와 서비스를 가장 경제적으로 공급 받고 공급하는 법칙이다.

중심지이론따라서 크리스탈러의 두 번째 문제는 주민이 재화와 서비스를 가장 경제적으로 공급 받고 도시가 그것을 가장 경제적으로 공급한다고 하였을 때 공간조직은 어떻게 짜여지겠느냐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등질적이고 어떤 방향으로도 이동에 장애가 없는 공간이라면, 그리고 각각의 중심지가 동일한 중심재화, 즉 그 기능의 존립에 필요한 최소요구치(threshold)와 도달범위가 같은 재화를 공급한다면, 그 공간조직은 각각의 중심지가 정삼각형의 꼭지점을 이루는 삼각격자형을 이룬 상태에서 서로 경쟁적인 각각의 중심지로부터 재화를 공급받는, 흔히 보완구역이라고 하는 공간이 육각형으로 분할되는 모습을 가지게 된다. 그래야만 최소한의 적은 수의 중심지가 빈틈없이 모든 공간에 재화가 공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조직에서는 생산가격의 차이는 고려되지 않고, 오로지 거리가 공간조직의 단일 변수가 되며, 정상이윤만 존재하고 초과이윤은 없다.

세 번째 문제는 동일한 재화가 아닌 최소요구치와 도달범위가 다른 재화들을 공급하는, 즉 중심성에 차이가 나는 중심지들이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면, 그때의 공간조직은 어떤 모습이겠느냐는 것이다. 크리스탈러는 중심성이 큰 고차의 중심지들이 중심성이 작은 저차의 중심지들의 보완구역을 분할·포섭하는 데는 세 가지 원리가 작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각 계층의 중심지 보완구역의 크기가 최소가 되어 가장 짧은 거리에서 재화를 공급하는 시장원리로 고차중심지의 보완구역은 저차중심지의 그것보다 3배수가 넓어지게 된다(K=3 system). 둘째는 고차 중심지들을 연결하는 교통로상에 가능한 한 중요한 중심지들이 많이 배열되도록 하는 교통원리로 이 원리에 따를 경우 보완구역의 크기는 4배수로 증가하게 되지만(K=4 system), 가장 효율적인 교통망이 건설된다. 셋째는 행정원리로 행정 통제상 고차의 행정중심지가 저차 행정중심지의 관할구역을 완전포섭하게 되어 보완구역의 크기보다 7배수 증가하게 된다(K=7 system). 행정원리에 따른 공간조직은 각 중심지의 보완구역이 커지기 때문에 행정통제에는 유리하지만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 측면에서는 비효율적이다. 이러한 크리스탈러의 중심지이론은 도시의 분포와 체계에 관한 공간적 질서를 일반화시켰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크리스탈러 자신에 의해 남부 독일을 사례로 검증되었지만, 베리(L. J. Berry)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도 적지 않게 실증되는 등 1960년대 이후 많은 연구의 진전을 보았다. 그러나 도시기능이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3차 산업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만큼, 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구조를 육각형구조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또한 정태적인 균형모델이기 때문에 어느 한 시점에서 중심지체계에 따른 공간조직을 설명할 수는 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른 변화는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 크리스탈러는 재화의 공급단위를 개별적으로 인식하여 집적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같은 독일인 뢰쉬(A. Lösh)의 중심지이론은 크리스탈러에 비해 훨씬 현실에 적합하고 유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들이 크리스탈러의 중심지이론이 갖는 공간질서에 대한 탁월한 인식과 설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한다. 크리스탈러 중심지모형의 가장 큰 특징은 공급자의 입장에서도 가장 효율적인 서비스 공급의 공간질서이고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가장 효율적인 서비스를 공급 받을 수 있는 공간질서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이윤효율성과 분배정의의 실현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따라서 계획적으로 취락을 정비할 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공간조직의 모형이며, 그래서 실제로 그의 모형은 많은 공간계획에서 응용된다.
크리스탈러 중심지이론의 보완과 응용

우리가 크리스탈러를 기억하는 이유는 주로 그의 박사학위논문과 거기에 담긴 중심지이론 때문이지만, 1932년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한 이후 1933년부터 1969년 타계할 때까지 그는 적어도 50여편이 넘는 논문과 4편의 단행본 논문을 포함한 많은 글들을 규칙적으로 발표였다. 1933년 이후 그의 연구주제를 보면 지속적으로 중심지이론을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며, 대체로 행정구역의 재조직, 관광활동의 공간조직에 관한 연구로 이어진다. 특히 그는 행정구역의 재조직이 그의 중심지이론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주제라고 여겼다.

행정구역에 관한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크리스탈러가 발간한 연구물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가 중심지이론에서 포섭원리의 하나로 행정원리를 들고 있듯이 행정구역의 본질은 그의 박사학위논문과 교수자격취득논문의 한 주제였으며, 그의 일생을 통해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박사학위논문의 서문에서 자신이 본래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연구하려 했던 것이 합리적 행정조직의 경제이론의 기초를 찾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크리스탈러는 국가의 행정조직은 두 가지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는 공간조직의 차원에서 최고의 합리성(효율성)을 갖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의 행정구조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복잡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공공재를 공급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두 개의 목표는 중심도시와 구역의 통합에 기초한 공간적으로 효율적인 행정체계에 의해 달성될 수 있으며, 그의 중심지이론이 그러한 체계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크리스탈러는 공공재의 공급비용에 중요성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시장원리를 만족시키는 것을 행정구역 조직의 전제조건으로 보았다. 따라서 행정중심도시의 보완구역이 되는 행정구역의 조직은 구역의 크기가 공공재 공급기능의 최소요구치를 만족하는 수준에서 작게 설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행정구역의 조직에 있어 또 하나의 전제조건, 즉 보완구역이 분할되지 않는 행정원리와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중심지이론을 계획지역과 같은 행정구역 조직에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시장원리와 행정원리를 결합하는 새로운 모형을 요구한다. 그러나 시장원리와 교통원리는 경제적 효율성에 기반한 원리로 차하위 중심지의 보완구역을 분할포섭할 수 있기 때문에 상호간에 결합이 가능하지만 행정원리에 의한 공간조직은 정치적 통제를 위한 완전포섭을 전제하기 때문에 시장원리와 결합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이에 따라 크리스탈러는 공공재의 효율적 배분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인식하에 행정원리의 역할을 시장원리와 동등한 차원이 아닌 하나의 고려해야 할 요인으로 간주하는 방향에서 그의 중심지이론을 재구축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시장원리에 의한 지역단위를 행정구역의 기본단위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기존에 제시한 3개의 원리에 이은 제4의 원리에 의한 시장-행정모형이라 하고, 지역계획과 행정구역의 재조직 등에 있어 이론적 토대로 삼았다. 이러한 혼합된 계층적 포섭원리는 전후에 그가 신독일의 행정구역을 제시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출처: 월간국토 1998년 5월호. 80-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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