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 도시는 농촌으로부터 빨아들이는 생산물에 의지해서만 존립할 수 있었다. 도시가 지배하는 농촌의 크기와 생산력 수준, 수탈율과 잉여 생산물의 농촌 내 유보 비율 등이 해당 도시의 규모를 규정했다. '놀고먹는 자들', 그것도 보통 농민들보다 더 많이 먹는 자들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그만 한 물질적 담보가 있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중세의 서울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데에는 크게 곤란을 겪지 않았다. 중세적 중앙집권 체제 하에서 현물 재정이 운용되는 한 서울은 더 커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빨아들이는 것이 있으면 뱉어내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도시의 흡수력에 비례하여 도시 인구가 배출하는 오물의 양도 늘어난다. 물론 전근대의 오물에서 오늘날의 쓰레기를 연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단 썩지 않는 쓰레기는 없었으며, 음식물이든 옷감이든 찌꺼기는 거의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농촌에서처럼 모든 오물이 완전히 자연으로 환원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인구에 비해 토지가 부족했다. 이 시대 도시 오물의 대종은 분뇨와 재, 특히 분뇨였지만 그걸 모두 땅이 흡수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몇 가지 처리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도시 내부에 텃밭을 만들거나 농촌에 '수출'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물에 흘려버리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성벽 주변에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 파묻어버리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물에 흘려버리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고 널리 쓰인 방법이었다.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보이는 잘 정비된 하수도를 갖춘 도시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다시 나타나지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평양과 경주에서도 고대 배수로의 흔적은 발견되고 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도 주택가 골목길 양편에는 하수도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골목길의 배수로는 도심부의 하천(개천)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졌다. 그 때문에 개천의 중심기능은 처음부터 하수도일 수밖이 없었다. 속어로 더러운 물을 '똥물'이라고 하는데, 똥이 더러운 것을 대표하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똥물'이라 한 것이 아니라 본시 '똥이 흘러다니는 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중략>
요컨대 분뇨 처리를 개천에 일임할 수는 없었다. 다른 보조적인 방법이 동원되어야 했다. 그중 하나는 '텃밭'이었다. 한양 정도 직후부터 도성 내에서 농사짓는 일은 금지되었지만 집터 안에 자그마한 텃밭을 가꾸는 일은 용인되었다. 국초만 해도 호당 필지 면적은 꽤 넓었기 때문에 텃밭의 규모는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텃밭이 일차적인 분뇨 투기장소로 사용되었다. 특히 인근 농민들이 분뇨를 얻으러 찾아오기 힘든 농번기에 텃밭은 분뇨 처리를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다른 한 가지는 가축에게 위임하는 것이었다. <중략>개와 돼지의 기능도 유사하다고 보아 일상적으로 '개돼지 같은 놈'이라는 말을 썼다. 그런데 대체 개돼지의 '유사한 기능'이란 무엇이었을까. 개와 돼지는 주로 '먹기 위해' 길렀다는 점이 일차적이다. 그러나 이것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다. 우리말에서 동물 이름 앞에 '똥'을 넣어 부르는 것은 개, 돼지, 파리밖에 없다. <중략>파리와 함께 개, 돼지의 또 한가지 기능상 유사성은 바로 '똥을 처리하는 것'이었다.<중략>
17세기까지, 도시 서울이 배출하는 도시 생활의 부산물들은 이들 세 요소-텃밭, 개천, 가축-에 의지하여 그럭저럭 안정적으로 처리될 수 있었다. <중략>
17세기말 서울에는 유난히 물난리가 잦았다. 1400년 이후 460년 간 한성부 일대의 물난리는 총 172회였다고 하는데, 이중 57회가 1650~1700년의 50년 사이에 집중되었다. 홍수가 날 때마다 개천 가의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쓸려 가는 일이 잇따랐다. 18세기에 들어와 홍수의 빈도는 줄었지만, 피해는 더 컸다.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개천의 하상이 교량 상판과 맞닿을 만큼 높아져 개천이 전혀 배수로 구실을 하지 못했다. 배수로 구실을 할 수 없는 개천에 지류의 물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니 적은 비에도 큰 물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백성(특히 서울 주민)을 남달리 '사랑'했던 영조 임금은 물난리의 주원인이 개천에 있음을 알고 대책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1753년 봄, 영조는 직접 현지조사에 나섰다. 임금은 수표교 어름에 오부방민(서울주민)을 대표할 만한 이들을 불러 모으고, 그 자리에서 한 노인에게 개천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자신이 어렸을 때만 해도 다리 밑으로 말탄 사람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어느 사이엔가' 하상이 높아져 다리 밑을 봉해버렸다고 답했다. 그 '어느 사이'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50~60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막혀버렸다. 변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장폐색'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1756년부터 영조 회심의 사업인 '준천'이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청계천 복원과정에서 준천에 관한 이야기는 상식처럼 되어버렸으니 구구히 늘어놓을 일은 아니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왜 개천이 막혔는가 하는 점이다.
<준천시사열무도> 영조 36년 음력2월, 20여만 명의 인원과 돈 3만 5000뀌미, 쌀 2300석을 투입하여 57일간에 걸쳐 개천 바닥을 파내는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는데, 이 공사를 '준천'이라 한다. 이는 조선 왕조 개국 초의 도성 축조, 궁궐 영건, 공랑 건설사업 이후 최대 규모의 사업이었고, 영조는 후일 이를 탕평, 균역과 더불어 자신의 3대 치적이라고 자평했다. 출처 : http://cafe.daum.net/ladyball555/1zLl/395?docid=wpGg1zLl39520060725085017 |
당시에도 여러 진단이 나왔다. '간사한 무리들이 도성 주변의 산림의 나무를 몰래 베거나 심지어 산자락에 밭을 일군 타에 토사가 흘러내린 때문'이라든가, '호강한 자들이 개천을 침범하여 집을 지은 탓에 제방이 무너진 때문'이라든가, '동대문 밖에 사는 자들이 논밭을 일구면서 물길을 막은 결과'라든가 하는 주장들이었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50~60년 사이에 갑작스럽게 이런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을까. <중략>
양란 이후 서울은 처음으로 '무서운 인구증가'를 경험했다. 상비군 병력과 그 식솔들, 서울에 걸식 차 올라왔다가 눌러앉은 유랑민들, 새로 벼슬길에 나선 시골 양반들이 서울의 새 주민이 되었다. 그런데도 벼슬자리 떼인 양반들은 낙향하지 않고 서울에서 버텼다. 당장 집터가 부족했다. 권세를 앞세워 남의 집 빼앗아 사는 여가탈입이 새삼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그렇다고 집 빼앗긴 자가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집 지을 엄두도 내지 않았던 곳이 새로 주택지가 되었다. 천변에 새로 집을 짓는 일이 빈발했다. 숙종 대에는 이미 천변 도로를 침범하여 새로 지은 집이 500여 호에 달했다. 사정히 이러했으니 큰 집을 여러 채의 작은 집으로 나누는 일도 많았을 터이다. 이제 텃밭은 사치가 되었다. 도시 내에서 분뇨와 쓰레기를 처리해주는 유용한 '시설'하나가 사라졌다.
사람이 많으면 소비량과 배설량도 더불어 늘어나게 마련이다. 늘어난 도시 주민의 찬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채전 개간이 성 밖 일대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중략> 이 시기의 생산력 증가는 도시 내부에 축적되는 '부'의 총량을 늘렸다. 음식 사치가 묘당의 논의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쓰레기는 늘어나는데, 그를 버릴 도시 내의 공간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겨울철이면 물이 말라붙은 개천 바닥은 분뇨와 더불어 김장 때 잘라버린 푸성귀 조각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50~60년 사이에 14km에 달하는 개천 바닥을 2~3m나 높일 정도의 엄청난 지리적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이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채소는 잘 썩고 분뇨는 잘 씻겨 내려간다. 쓰레기를 하상에 점착시키는 접착제 문제가 남아 있다. 바로 '재'이다. <중략>나무와 숯 말고는 다른 연료가 없었던 조선시대에도 '재'는 도시 쓰레기의 대종이었다. 도시 생활에서 '재'가 나오지 않을 도리는 없다. 이번에는 그 양이 문제였다. < 중략>
도시 서울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서울 주변의 산에서는 투장, 채석, 벌목이 모두 금지되었다. 서울의 지맥을 보호하고 왕릉 예비지를 확보하여 때로는 왕의 사냥터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서울 사람들에게 '땔감'은 곧 쌀이었고 옷이었다. 쌀과 옷을 때서 온기를 얻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쌀과 땔감이 상호 전환되는 물자였다. 오죽하면 행복한 삶을 표현하는 말이 '등 따습고 배부른 삶'이 되었겠는가.
지금 서울에는 조선 초기 민가 건축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그 구조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도 당연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측컨데 모든 방이 온돌방으로 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략>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마루방이 하나 둘씩 온돌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성균관 양재 일부가 온돌방으로 바뀐 것은 일찍이 세종 때 일이었지만, 궁궐과 민가에서 온돌방을 늘리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였다. 궁궐 내 마루방들이 모두 온돌방으로 바뀌어 시목을 공급하는 기인들이 죽어난다는 얘기가 빈번히 튀어나왔다. 영조 연간에 이르면 서울 주위 사산에서 몰래 나무를 베어 내다 파는 자들이 무수히 늘어났지만, 이들은 대게 궁가붙이여서 단속도 쉽지 않았다. 왕이 금송의 영을 엄히 내리고 사산금표도를 제작, 배포하는 한편 군영마다 담당 구역을 지정하여 감시하도록 했지만, '간사한 자들'이 산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때쯤에는 이미 땔나무는 '돈'이어서 시목전에서 팔았고 땔나무 행상도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사산금표도> 도성 주위 내사산에서 매장, 채석, 벌목 등 일체의 산림 이용을 금하고 해당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군영별 관할구역을 표시한 지도이다. 이 지도는 영조 연간에 제작된 것이다. 출처 : http://www.museum.seoul.kr/yuimage/10/seo242.jpg |
서울 사람들 살림살이가 전보다 나아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 때문일까. 아무래도 겨울철 기온이 더 낮아졌던 것 같다. 돈을 때서라도 추위를 이겨야 했다. 이 무렵에는 땔감 소비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이엄(귀마개)같은 방한구 소비도 늘어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주택 난방 능력은 '신분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중략>
재는 분뇨와 섞이면 훌륭한 비료(퇴비)가 된다. 그러나 그건 농촌에서만이다. 도시에서는 더이상 썩지도 않고 물에 잘 쓸려내려가지도 않는 괘씸한 오물일 뿐이다. 땅바닥에 깔려 있던 재가 흙과 섞여 있다가 물에 쓸려 개천에 들어가 다시 똥과 버무려지면 하천 바닥에 딱 붙어버릴 수밖에. 조선 후기 서울 개천 폐색의 주범은 다름 아닌 도시민들 자신이었다.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살고자 한 도시민들의 욕망과 그를 실현할 수 있게 해준 '늘어난 부'.
<서울은 깊다> 전우용 저, 2008, p.60~73
요약
*도시오염물의 배출 혹은 처리 능력 : 전근대 도시의 규모 및 존립을 결정하는 요인 중 하나
- 오염물 종류 : 분뇨, 재 등(잘 썩음, 하지만 도시에서 처리하기 힘듬)
- 오염물 처리방법
1. 하수도를 건설-서울에서는 개천(청계천)
2. 집 뒤편 텃밭에 버림
3. 개, 돼지가 먹도록 함
*18세기, 몇십년 사이에 개천 하상이 갑자기 높아져 개천기능이 저하됨.
->영조는 준천사업을 통해 개천의 기능을 되살림
- 개천이 막히게 된 이유
1. 인구증가->천변 및 텃밭에 주택 침투->오염물 처리기능 저하->개천에 오염물 집중 심화
2. 인구증가 및 부 증가->오염물 총량 증가, 채소소비 증가->개천에 오염물 집중 심화
3. 기온 한랭화->온돌사용 급증->벌채를 통한 난방으로 '재' 증가->개천에 오염물 침착
- 18세기 서울의 청계천 물난리는 결국 많은 인구가 집중되어 발생한 것이므로, 서울시민들이 자초한 것이다.
소고
-전근대 도시공간으로서 서울의 역사지리적 경관변화를 명료한 논리로 접근하고 있음
-18세기경 소빙기와 관련하여 좀 더 자연적 측면을 강조하는 게 좋을듯함
ex) -인공적 벌채와 더불어 기온 한랭화는 식생의 축소를 가져옴
->산지에 매스무브먼트 및 토양침식 증가
-기온 한랭화와 함께 강수량 감소는 하천의 하중 운반력을 감소시킴
->운반력이 낮은 하천은 토사를 하상에 매적, 하상이 높아짐
-개천(청계천)은 원래 '자연경관'이라기보다, 전근대 도시로서 서울의 하수도 기능을 가진 '인공경관'으로 이해해야 함. 이러한 관점은 현재의 청계천 '복원'사업을 이해하고 개선하는 데 중요하다고 보임. 물론 '도심공원으로서의 청계천'으로 본다면 얘기는 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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